칼럼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조류인플루엔자(AI)이지만 올해는 뭔가 다르다. 과거 같으면 온 언론이 연일 주요 기사로 다루고 정치권과 정부가 나서 대책마련에 부산했을 텐데 올해는 피해규모가 사상 최대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데도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온 그 자체이니 하는 말이다. 연례행사로 반복되다 보니 둔감해 진 탓일까. 아니면 계절성 유행병이라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겠다는 것일까. 원인은 단 한가지다. 최순실 사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이른바 ‘최순실 블랙홀’ 현상 때문이다. 모든 국정이 그렇듯 AI 또한 좀처럼 누그러들 기미조차 않은 채 날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도 그 심각성이 최순실 파문에 묻히고 만 것이다. 이래저래 농민들만 골병 들게 생겼다.


 전국의 닭·오리 농장이 고병원성 AI로 초비상이다.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이 AI에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AI가 처음으로 확인된 지난 11월16일 이후 40일만에 AI에 감염됐거나 예방 차원에서 살처분 된 가금류가 전체 가금류의 16%인 2천700만 마리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가장 큰 피해를 본 2년 전 AI 사태 때 1천만 마리가 살처분 되기까지 100여일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감염 속도다. 더군다나 산란계와 번식용 씨닭인 산란종계까지 대규모로 살처분 되면서 ‘달걀 대란’까지 빚어지고 있다. 달걀 1판 가격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9천원을 넘어서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제과·제빵업계 등이 치명타를 입고 있다. 지금까지 AI로 양계 농가와 관련 업계 등이 입은 피해액은 1조원에 육박한다. 일부에서는 내년 2월까지 5천만마리가 살처분 될 수 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1조5천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정부 당국은 이런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국정공백 속에 갈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책 하나 내놓지 않은 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AI 위기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시킨 것이 고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AI가 발생한 이웃 일본을 보면 최초 발생 2시간만에 총리실에 대책반을 두고 실시간 상황 점검에 나설 정도로 발 빠르게 대처해 피해규모가 우리의 10%에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하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AI 첫 확진 판정 후 5일 만에 관계부처회의를 열었고 이후에도 각 지자체와 농림축산식품부 만이 고군분투하며 AI 차단에 나섰을 뿐 정부차원의 컨트롤타워 설치나 합동 방역대책반 가동과 같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전형적인 늑장 대응으로 화를 키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언론 보도를 보면 양계장 여러 개를 운영하고 있는 한 농장 대표는 “중앙정부는 사태 수습을 지방정부에 미루고, 도는 군에 미루고, 군은 농가를 압박해요. ‘농가가 중앙정부, 지자체 역할 다 하라’하니 AI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걸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정부차원의 AI 대책이 있긴 한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행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나선 것은 AI 첫 발생 40일만이다. AI 사태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뒤늦은 행보로 비판받고 있다. 달걀 값이 공급 부족으로 치솟고 지방의 방역 공무원이 과로사 하는가 하면 연말연시 타종식과 해넘이, 해맞이 행사가 줄줄이 취소돼 지역경제에 큰 타격이 예상되는 시점이 되고서야 AI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황 권한대행은 28일 열린 AI일일점검회의에서 “앞으로 1주일 내 AI 수습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AI 확산을 지시 한마디로 차단 될 일인가. 그것도 ‘1주일의 시한’을 주문했다니 추상같은 엄명이라 AI가 겁이라도 먹도 물러 갈 줄 안 모양이다. 과거처럼 국방부와 행정자치부, 국민안전처, 지자체 등을 총망라한 합동대책반을 만들어 총력태세로 AI 차단에 나서도 부족할 판인데도 말이다. 지시하는 말보다는 ‘강제성’ 있는 대책이라도 제시하고 현장을 방문해 철저한 방역을 독려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정부의 안이한 대응 자세와 함께 온 국민이 최순실 사태에 이목이 집중돼 있는 것도 문제다. AI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달걀 값이 크게 오른다니 관심이 갈뿐 직접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일과성 문제로 여기는 것 같다. 언론도 큰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온 종일 ‘최순실 게이트’ 보도에만 열을 올릴 뿐이다. 이 정도면 1면의 주요 기사로 다룰 만한데도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공백이 AI를 사상 최대 피해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전염성이 강한 질병의 경우 전 국민의 협조만이 확산을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닭과 오리의 수급은 민생과 직결된다. 살처분 된 가금류를 묻은 토양 오염 등은 농민의 걱정거리이다. 생필품 가격을 부추길 수 있다. 국민의 자각과 언론의 협조, 정부의 총력 방역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뜻이다. 임금은 백성이 세우지만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 당태종의 중신이었던 위징이 이를 인용하여 간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 헌법재판소에 가 있는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이 말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촛불 민심이 노도와 같이 들끓으면서 대통령을 물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정부는 이런 민심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국록을 먹는 공직자는 ‘권력 바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은 제대로 해야 마땅하다. ‘무노동 무임금’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정권에 휘둘리지 않아야 바른 공직자다.

 정부는 이번 AI사태와 관련해 역학조사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축사를 오가는 차량과 사람에 의한 감염보다 철새의 이동·접촉에 따른 감염이 주된 원인”이라고 밝혔다. 책임의 상당 부분을 철새에 떠넘긴 것이다. 그러니 철새에 책임을 묻든지 아니면 농민이 피해를 감수하라는 말로 들린다. 정부의 늦장 대응이 확산에 일조한 것에 대한 반성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이게 나라냐’는 말이 나올 만하다. 민심의 분노를 오히려 부추기는 말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AI관련 신속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관련부처에만 맡겨놓을 일은 결코 아니다. 철새에 책임을 떠넘기는 옹졸한 대응은 성난 민심의 물이 배를 뒤집히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